걷다

이찬희
2 min readNov 1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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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걷고 싶은 날이 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는다.

세상은 어지럽다. 내가 나로서 지금 두 발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두 발에 의해 내가 걸어가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땅바닥이 알아서 움직이기에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인가.

바람 부는 저녁 여섯시면, 불과 몇 달 전까지 환하게 세상을 비추던 태양마저 없어지고, 모든 것이 까맣게 물들어버린다. 간신히 가로등 몇 개에 의지해 일단 겉으로 보면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맨발로 길을 걸어보았는가. 약간은 거칠지만 실은 누구보다 동그랗고 단단한 자갈과 모래를, 흙을 온전히 느끼며 걸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매일을 겉모습만 화려한, 어쩌면 우리의 키부터 많은 것마저 감싸버리는 녀석에게 이 느낌을 내어주고만 있다. 밟아 제 모습을 잃고, 밟아 부서지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온전히 그것을 ‘나의 걸음’으로 만들 수 있다.

한 발을 내딛는 것부터 우리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진화를 거쳐 사람에 가까워지며 인류는 걷기 시작했고, 인류는 걸으며 뛰기 시작했고, 결국엔 달과 우주에도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 모든 것은 지금 내딛지 않는 나의 한 발자국부터. 어쩌면, 지금의 나를 완전히 바꿔버릴지도 모를. 하지만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강한 무언가로서의 발자국을 내딛는다.

발을 최대한 깊게 땅에 찍는다.
발자국을 선명히 남겨 지금 내가 시작했다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한다.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리고, 첫 발자국으로부터 멀어져 불안하다. 하지만, 이내 곧 우리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익숙함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익숙한 흙내음을, 정겹던 자갈돌을, 안에만 숨겨왔던 우리의 속도감을 되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빠르게 뛰어나갈 것이다.

심장이 빠르게 울린다.
울음 가득한 세상에, 따뜻한 고동 소리 하나가 더해져 크게 울리는 나의 발자국, 온전한 나의 걸음을.

지금 나는 걷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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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희
이찬희

Written by 이찬희

Building invisible things for visible one — Software Engineer @​AB180. Founder @​sullivan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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